1970년대 중반, 대구의 가톨릭고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단발머리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다가 장발 단속반에 수 차례 잡혀갔다. 1978년, 그는 철수한 미군 비행 장을 크사실주의로 그려 한국 최초의 민전이었던 제 1회 동아일보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다. 미국에 의해 좌우된 대한민국의 비극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화 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제 5공화국 출범 후 그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동아일보는 백지광고’ 사태를 맞는다. 어느 날 빨리 움직이라’는 전화 한 통을 받은 그는 거의 야반도주하 다시피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붓과 물감, 1인용 산요 전기밥통을 등산용 배낭을 맨 그는 가을 날 JFK공항에 도착했다. 그때가 1981년 9월이었다.
뉴욕으로 정치적인 망명, 생선가게에서 만난 화랑 주인, 상류사회 백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화가 변종근(65)>씨는 극빈자에서 최상류충까지 오가며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의 파고를 고고하게 영해왔다.
그러나, 30년의 이민생활에서 그는 생선가게에서 3개월 일한 것 빼곤 전업작가의 길을 고수해온 행운의 화가다. 할렘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물감이 없어 거리로 나간 변씨는 폐기물을 줍기 시작했다. 생활이 피면서 벼룩시장과 중고서점을 드나들었고, 곳곳에서 발견한 오브제들로 아상블라쥬와 사진적인 리얼리즘을 매치한 작품을 들고 88서울올림픽 때 백남준씨와 함께 고국에 금의환향했다.
브루클린 보름힐에 있는 그의 집과 스튜디오는 ‘변종곤의 우주’이자 ‘미니 박물관’으로 불리운다. 한국 미술계에선 뉴욕에 오면 반드시 방문해야할 명소가 됐다.
변종곤씨가 뉴욕 생활 30년을 결산하는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17일부터 11월 6일까지 브루클린의 전시공간 ‘인비지블 독(The Invisible Dog)’의 3000평방피트 갤러 리에서 ‘아파트 #1L의 레이어(A Layer of The #1L’를 주제로 15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 오프닝 바로 전날 변씨는 시민권을 취득했다. 전시장 2층, 그의 30년 작업 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스튜디오에서 변씨를 만났다.
August 17,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