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에 뿌리내린 한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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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되었지만 뉴욕은 여전히 나를 흥분시켜요.”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의 신선한 자극과 활기가 작가 변종곤의 말에서 배어 나온다. 처음 이곳에 와서 숨쉰 자유의 느낌을 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해 그는 뉴욕 한국 문화원과 파리에서 동시에 전시를 가졌다. 얼마 전 반기문 유엔 총장의 취임 기념식에는 뉴욕의 대표 한국 작가로 초청됐다. 뉴욕에 한국 문화원이 생겨 한국 작가에 관심을 가져주기는 그가 이곳에 온 지 사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그는 얼마 전 한 독지가의 후원으로 큰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좀 더 커다란 작품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이전까지 작업실 겸 거주지로 쓰였던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니 20여 년 뉴욕 생활과 작품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벽면부터 천장까지 제법 값이 나갈 듯한 골동품에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듯한 잡동사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작업실은 그 자체가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예술 작품이다. 그곳은 부처와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마릴린 먼로가 함께하는 총체적인 우주, 만다라이다. 20여 년 동안 벼룩시장에서 직접 고르고 사 모은 것들인데, 이 중 절반은 그의 작품이 됐다.

목조 예수상이 수신기를 쓰고 있고, 모나리자 인형이 북 찢은 치마를 입고 섹시한 다리를 드러낸다. 바이올린을 애완견처럼 질질 끌고 가는 퍼포먼스를 했던 백남준의 뒷모습은 아이러니하게 그가 학대했던 앤티크 바이올린 위에 그려져 있다. 물론 이 바이올린도 목이 비틀어져 있다. 벽난로 위에는 입맞춤하는 신부와 수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베네통 광고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지구의 마지막 날 인간이 행하는 가장 숭고한 행위는 사랑, 모든 금기를 넘어서는 사랑이란 암시이다. 철로 된 물통 위에는 우디 앨런이 그려져 있다. 본인은 우울해서 짓는 표정인데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전형적인 광대의 표정이다. 그는 벼룩시장 등을 돌며 수집한 물건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그 위에 특유의 놀라운 사실주의적인 필치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나는 옛날 물건들이 좋아요. 옛날 기계들은 사람을 닮았어요. 이 물건들을 만지고 있으면 수혈을 받는 느낌입니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버려지는 이런 물건들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는 각기 다른 물건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유머가 함께 담긴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변종곤은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이다. 그가 순수 회화가 아니라 이런 오브제 작업을 하게 된 것은 뉴욕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오게 되면서부터다.

변종곤은 1978년, 철수한 미군 비행장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 동아미술대상을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화가로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는 상을 받고도, 그는 반미 인사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달랑 물감 든 배낭 하나 메고 빈손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게 1981년이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도 꺼리는 핏자국으로 얼룩진 거리, 할렘에서 3년을 살았다.

“한국에서는 캔버스를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죠. 미국에 오니까 버려진 물건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물감 살 돈은 없고, 그것들을 작품으로 만들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버려진 물건들을 주우며 그는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 나갔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시작된 작품이다. 뉴욕에서 그의 생활은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국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도망친 그에게 뉴욕의 공기는 자유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배고픈 자유였다.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상황은 나빴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열정만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화가가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작품을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오직 작품에만 매달렸다. 배가 고파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때 가수 한대수가 꿀 한 병과 우유 한 병을 들고 찾아왔다.

“꿀을 한 숟가락씩 매일 먹으면 한 달은 산다고 하니, 한번 살아보라. 그리고 결정해라. 뉴욕을 떠날 것인지, 있을 것인지.”
March 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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