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1면에 실려버렸다?
변종곤은 1978년, 제1회 동아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그때였지만, 실상 그는 현대미술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미술 운동 단체 ‘에꼴 드 서울(Ecole de Seoul)*’의 일원으로 일찍이 명성을 떨쳤다. 비단길만 펼쳐질 것 같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미국 ‘망명’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후 폐허가 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그린 것이 동아미술대전 출품작이었기 때문. 미군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혼혈아가 방황하는 거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작품은,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 대상으로 삼았던 당대 군사정권이 죄를 묻기 충분했다. 그는 예술가의 자유를 보장하기는커녕 서슬 푸른 잣대를 들이미는 고국을 떠나기로 했다.
촉망받는 신예에서 한순간 화단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변종곤에게는 자유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 그가 미국행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생을 만끽하는 히피 문화와 예술혼이 들끓는 도시. 최소한의 생필품과 일인용 전기밥솥, 화구 뭉치를 챙겨 도착한 그곳은 뉴욕의 할렘이었다. 험한 사건이 지천인 할렘이라니! 변종곤은 뉴욕에서 버려진 오브제를 수집해 작품의 주요 매체로 삼았다. 이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유명 외신이 소개하고,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인디애나 폴리스 미술관(Indianapolis Museum of Art),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영구 소장하는 작품의 작가로 도약했다. “마치 주머니 속 죽음을 넣고 다닌 듯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곤궁했던 그가, 뉴욕을 대표하는 한국 작가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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