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정적의 천년을 관통한 무거운 돌이 있다. 경주 황룡사터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거대한 초석(礎石)은 1400년이 넘는 긴긴 시간 그저 한자리를 지켜왔다. 외로운 적요의 더께를 간직한 이 석물(石物)은 세월의 중첩에 따라 더욱 견고해졌고 무심해졌을 테다. 정명택(53)의 ‘둠(Doom)’도 그러하다. 10여 년 전, 동도 트지 않은 여명 속에서 이들 석물을 마주한 작가는 그로부터 우리 고유의 성정을 발견하고 이를 아트퍼니처를 주축으로 조각 혹은 설치의 형태로도 풀어내 오고 있다. 대표 연작 ‘둠’은 새벽 사찰터에서 본 초석의 투박한 겉모습을 본뜸으로써 그에 내재된 정체성과 자생적인 정신성을 섬세하게 담아낸 청동 벤치 작업이다.
이처럼 우리 문화의 정신이 담긴 전통 건축물의 초석과 기둥, 마루 등 은일(隱逸)한 대상을 소재로 삼아, 본태를 유지하되 절제된 담박함과 꾸밈없는 무심함을 지닌 그의 작업은 충만함과 그득함으로 전복된다. 정명택 작품 특유의 조형미가 한국 문화유산이 품은 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이유다. 현란한 외형이나 화려한 겉멋이 아닌, 소박한 비움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풍요로운 정신세계와 그 맥이 유사하다.
February 14,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