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애니 모리스는 10여년 전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유산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작가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경험은 임신부의 배를 상징하는 둥근 형체를 수직으로 쌓은 '스택'(Stack) 연작으로 이어졌다.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모리스의 첫 한국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표작 스택 연작을 비롯해 꽃 여인 시리즈, 실 페인팅(Thread Painting)까지 작가의 다양한 작업을 볼 수 있는 전시다.
큰 구체가 작은 구체의 위에 있는 등 '불가능한' 구조로 쌓인 스택 연작에서는 뭔가 불안함이 느껴진다. 아이의 죽음을 경험한 데서 오는 공포와 불안감이 반영된 작업이다.
스택 연작이 그렇듯이 작가는 자기 경험을 작품에 투사한다.
꽃 형태의 머리와 임신한 여성을 상징하는 신체 모양의 강철 조각 '꽃 여인'은 부모의 이혼 경험에서 비롯됐다. 철을 사용했지만 철의 강인함보다는 유약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한순간에 지고 시드는 꽃에 비유해 이혼 과정에서 약해진 어머니의 모습, 자신이 목격했던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한 작업이다.
힘든 경험들이 반영됐지만 작품은 작가가 배합해 만든 안료의 선명한 색상과 리듬감으로 산뜻하고 경쾌한 느낌도 준다. 지난달 30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비극적인 경험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리넨 위에 바느질한 작업도 볼 수 있다. 파스텔이나 목탄을 이용한 회화 같은 질감이 느껴지는 이 작업을 두고 작가는 '실 페인팅'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내 작업은 조각과 회화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다"라면서 "제한된 소재로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표현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2일까지.